인천광역시 남동구 향토문화유적

쪼옴 0 4,700 2019.11.04 17:49

논현포대
논현포대(論峴砲臺)논현포대는 19세기 후반 외세의 침입이 빈번해짐에 따라 인천과 부평 연안의 군사방어시설을 강화하기 위하여 1879년(고종16)에 축조되었다. 일명 호구(虎口) 포대로도 불리는 이 포대는 인천항 부근의 묘도포대, 제물포포대 등과 함께 화도진에 소속되었다가 1894년 화도진이 철폐되면서 폐쇄되었다. 당시 제작된 『화도진도』에는 2개의 포좌 앞으로 갯골수로가 흐르고 있는데, 이수로를 따라 침입하는 소형 선박을 방어할 목적이었던 것으로 짐작된다. 포대는 포좌의 아랫부분에 잡석을 깔고 중단과 상단에 장대석을 쌓았으며 그 위에 봉토를 한 형식이다. 포좌는 이동식 중포 2문이 설치되었을 것으로 보인다.

 

김재로묘
김재료 묘(金在魯 墓)김재로(1682-1759)는 조선 숙종때 우의정을 지낸 김구의 아들이다. 숙종 36년(1710) 문과에 급제하여 여러 관직을 거친 후 대사간에 올랐다가 경종 2년(1722)에 신임사화로 파직되었다. 영조4년(1728) 이인좌의 난이 일어나자 충주목사가 되어 난을 평정하는데 공을 세웠다. 그 후 판서, 우의정, 좌의정을 거처 영조 16년(1740) 영의정에 올랐다. 묘역에는 무덤 뒤에 토담(곡장, 曲墻)을 두르고 묘비, 상석, 망주석, 석등, 양석(羊石)등을 갖추었다.

 

조정만묘
조정만묘(趙正萬墓)조정만(1656~1739)은 당대의 유명한 유학자 송준길(宋浚吉) 문하에서 학문을 배우고 숙종 7년(1681) 진사시에서 장원 급제하고 성균관에 입학하였다. 이듬해에 윤증이 송시열을 배반한 사건에 대해 성균관 유생들을 이끌고 윤증을 규탄하는 상소를 올리기도 하였다. 그 후 중앙과 지방의 주요 관직을 거쳤다. 무덤에는 망주석·문인석 각 한 쌍이 배치되어 있고 근처에는 높이3.5m,  너비 1m 의 신도비가 있다.

 

장수동 은행나무
장수동(長壽洞) 은행(銀杏)나무은행나무는 낙엽침엽 교목으로 사찰이나 향교뜰에 많이 심었으며 은행이란 이름은 열매가 겉으로 보기에는 살구같이 생겼으나 과육을 제거하면 은백색의 종자가 나온다는 뜻에서 붙였다고 한다. 높이 30m, 둘레 8.6m, 나이 800여년에 달하는 오래된 큰 나무로 5개의 가지가 균형을 이루며 뻗어 있어 아름다운 모양을 하고 있다. 예전에는 마을 주민들이 매년 음력 7월과 10월에 재물을 차리고 풍년과 무사태평을 기원하였고 집안에 액운이나 돌림병이 돌면 이 나무에 제물을 차려 놓고 치성을 올렸다.

 

이여발묘
이여발묘(李汝發墓)이여발(1621~1683)은 조선 숙종때 무관으로 효종2년(1651) 무광에 급제하여 비변랑, 숙천부사, 충청병마 절도사를 거쳐 회령부사를 역임하고 한흥군(韓興君)에 봉해졌다. 현종때에는 병조 및 공조참판과 어영대장  한성 좌, 우윤을 역임하였으며 숙종때에는 지중추부사에 올랐다. 숙종 9년(1683) 6월에 사망하여 인천시 서구 신현동 문중 묘지에 안장하였다가 1703년 현 위치에 이장(移葬) 하고 묘비와 석물을 배치하고 신도비를 건립하였다.

 

월성박씨종중묘역
월성박씨 종중묘역月城朴氏 宗中墓域월성박씨(月城朴氏)는 신라 제54대 경명왕(景明王)의 제8왕자인 월성대군(月城大君)의 자손으로 고려후기에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하여 조선 전기와 중기에 크게 융성하였다. 중시조인 박구(朴龜, 1337~1404)는 고려 중군사정부령(中軍司正副令)을 역임하였는데, 고려가 망하자 이곳에 칩거하면서 자신을 감춘다하여 호를 ‘장아(藏我)’라 하고 뒷산을 장아산이라 하였다.장아산(해발 736m) 서쪽 구릉에 위치한 월성박씨 종중 묘역에는 현재 박구와 그의 후손인 박간(朴幹간), 박휘(朴徽), 박신겸(朴信謙), 박호겸(朴好謙), 박홍중(朴弘中) 등 11기의 묘가 남아 있다. 그중 통훈대부 추산(秋山) 박홍중은 조선중기의 문인으로 문장과 서예에 능하였고 관직을 물러난 후 장아산에서 후학을 지도하였다.이 묘역에 있는 봉분과 묘포, 문인석, 망주석 등은 조선시대 사대부들의 유교적인 묘제로서 특히 박휘와 박신겸, 박호겸의 묘포는 제작 년대가 분명하여 조선중기의 묘제와 조각사 연구에 중요한 금석문 자료이다.

 

이승훈묘
이승훈 묘한국 카톨릭 교회의 최초 영세자인 이승훈(1756~1801)의 묘이다. 그는 25세에 진사가 되었으나 벼슬을 하지 않고 학문에 정진하던 중 동지사의 서장관으로 떠나는 아버지를 따라 북경에 가게 된다. 이곳에서 선교사들로부터 교리를 배운 후 ''''''''조선 교회의 주춧돌이 되라.''''''''는 뜻의 ''''''''베드로''''''''라는 이름으로 그라몽 신부에게 세례를 받게 된다. 정조 9년(1785) 서울 명동의 김범우 집을 교회로 삼아 한국 최초의 천주교회를 창설하였다. 이곳에서 정기적으로 모임을 갖고 교인들에게 교리를 가르쳤다. 그 후, 몇 차례의 배교와 복교의 과정을 거치다가 신유박해(1801)때 정약종 등 여러 신자와 함께 서소문 밖에서 참수형을 당하였다. 그의 유해는 1981년 경기도 광주군의 천주교 성지 천진암으로 옮겨져 현재 이곳에는 비석과가묘만이 두 아들의 묘와 함께 남아 있다.

 

장도포대지
장도포대지(獐島砲臺址)장도포대지는 조선고종 16년(1879)에 인천으로 진입하는 이양선을 막기 위하여 화도진을 구축할 당시 축조되었다. 국립중앙도서관에 소장되어 있는 ''''''''화도진도''''''''에서 이곳에 3개의 포좌가 설치됐었다는 사실이 확인되었는데, 2개는 바다 쪽을 향하고 있고, 1개는 동남쪽을 향하고 있어 각각 외곽과 내곽 수비가 목적이었음을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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