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기도 수원시 향토문화유적

쪼옴 0 4,242 2019.11.04 17:35
항미정
항미정(杭眉亭)은 서호에 있는 정자로, 본래는 화성을 쌓을 때 서호 동북쪽에 세웠는데 1831년(순조 31)에 당시 화성유수였던 박기수(朴綺壽)가 현재의 자리에 건립하였다. 그 뒤 유수 신석희와 관찰사 오익영이 중수 했다. 그 이름은 중국 시인 소동파(蘇東坡)의 시구(詩句)에 “서호는 항주(杭州)의 미목(眉目) 같다”고 읊은 데서 따서 지었다. 서호의 경관과 풍치를 한층 아름답고 돋보이게 하는 명물이 바로 항미정이다. 구조는 ㄴ자형 평면에 납도리집(기둥 위에 사각형 단면으로 된 도리를 얹어 꾸민 집)이고, 중앙 5량과 양단 3량의 홑처마 목조건물로 면적은 43.64㎡이다.


거북산당
영동 거북산당은 수원의 대표적인 마을굿 중에 하나인 거북산당 도당굿을 행하는 당집이다. 현재 영동 거북산당에서는 매년 음력 10월 7일에 영동시장의 번영과 상인들의 평안을 빌기 위하여 도당굿을 거행한다. 거북산당은 정면 507㎝, 측면 266㎝ 규모를 갖고 있으며, 지붕은 맞배지붕에 골기와를 얹었으며 동북쪽을 향하고 있다. 1964년에 지어졌으며, 1986년 수원시 향토문화유적 제2호로 지정되면서 새로 단청을 입혔고, 1994년에 다시 건물의 개보수가 이루어졌다. 당집 내부에는 제단과 ‘대왕님(염라대왕님)’, ‘거북도당 할아버지’와 ‘거북도당할머니’의 신격의 형상을 그린 그림 두 폭이 걸려있다.

 

수원역대목민관 송덕비군
수원의 역대 관리들의 불망비 및 선정비로서 옛 사람들은 오래 기억하고 널리 기릴 일이 있을 때 돌에 그 뜻을 새기어 두루 읽고 나누었다. 수원역대목민관 송덕비들은 원래 수원지역 곳곳에 흩어져 있던 것을 노송지대에 모아 두었다가 현재 수원박물관 야외 전시장에 27기, 수원화성박물관 야외 전시장에 10기가 보존 전시되고 있다.

 

미륵당
마을 수호신으로 믿어지던 미륵불이 모셔져 있는 집으로 1959년에 새롭게 단장하면서 ‘법화당(法華堂)’으로 이름을 바꾸었다. 사방 1칸, 주칸 3.1m의 벽돌로 축조된 작은 건물이며, 지붕은 맞배이다. 현재 미륵불은 상반신만 드러나 있고 하반신은 거의 매몰된 상태이다. 상체 부문의 높이만 약 244cm, 가슴 폭 107cm, 머리 높이 114cm정도이며 화강암으로 만들어졌다. 전반적으로 토속적인 조각 수법에 친근감을 주는 특징이 있어 조선중기 이후 민간신앙과 결합된 미륵불상으로 파악된다.

 

정유선생묘
정유(鄭裕, 1503∼1566)는 명종대의 문신으로 본관은 온양(溫陽), 자는 공작(公綽), 호는 양진당(養眞堂), 보진당(?鎭堂)이다. 통진현감을 지낸 정수강(鄭守綱)의 아들이다. 1528년 사마시에 합격하고, 1537년 문과(文科)에 급제하였다. 사헌부(司憲府)와 사간원(司諫院), 홍문관(弘文館)등 삼사(三司)의 여러 벼슬을 거처 1555년 대사헌에 임명되었으며, 황해도와 강원도의 관찰사를 역임하였다. 임금과 학문을 강론(講論)하는 경연(經筵)에 오랫동안 참여하여 명종의 총애를 받았으며 명나라에 사신으로 다녀오기도 하였다. 묘는 쌍분형태로 정수강(鄭守綱) 묘 하단에 서남향으로 자리잡았다. 묘에는 16세기 후반에 세운 묘갈, 혼유석, 상석, 향로석, 망주석 1쌍, 문인석 1쌍이 있다. 대리석 비신을 사용한 묘갈은 서애 유성룡(柳成龍)이 지은 비문을 석봉 한호(韓護)가 썼으며, 김응남(金應南)이 전액(篆額)을 써서 세운 것으로 학술적 가치가 크다.

 

이목동 출토 석관묘
경기도 수원시 장안구 이목동 242-3번지 일대 유적으로 구릉이 능선 정상부에서 아래까지 남에서 북으로 완만한 능선을 이루고 있다. 이목동 유적은 통일신라시대 수원지역에서 처음으로 발굴되었다. 1호 석곽묘를 2008년 수원박물관으로 이전 복원하여 야외전시하고 있다. 통일신라시대의 무덤인 이목동 1호 석곽묘는 청동기시대 집터를 파괴한 위에 조성되었다. 무덤의 석축벽은 3~5단 정도씩 남아 있고 시신을 눕혀 놓는 시상(屍床)은 소형의 평평한 석재를 바닥 전면에 1겹으로 깔았다. 관을 사용하지 않고 시신을 그대로 안치했던 것으로 추정된다. 시신의 가슴 위치 부근에서 회청색의 연질 완과 연황색의 연질 대부완 등의 유물이 출토되었다.

 

꽃뫼 제사 유적지
팔달구 화서동에 위치하는 유적으로 청동기시대의 구멍무늬토기편과 삼국 · 조선시대의 유물이 수습되었다. 그리고 삼국시대부터 내려오는 중요한 제사 유적지임이 확인되기도 했는데, 마을에서는 오래 전부터 추석을 전후한 시기에 모든 주민들이 참여하여 동제(洞祭, 마을제사)를 올렸다고 한다. ‘꽃뫼’라는 이름은 옛날 옛적 병든 아버지를 극진히 모시던 한 처녀가 함께 일하던 머슴에게 욕을 보인 후 이 산에서 목을 매달았는데, 몇 해가 지난 후 그 처녀가 묻힌 자리에서 꽃나무가 무성히 자라나서, 그 때부터 사람들은 효심이 지극했던 처녀를 생각하며 ‘꽃뫼’라고 불렀다고 한다.

 

고색동 코잡이놀이 및 도당
고색동 코잡이놀이의 유래는 정확한 기록은 없지만 신라시대 이전부터 행해진 것으로 추정되며, 1796년 수원화성 축성 이후 양반계층과 평민계층인 농민이 모두 모여 정월 대보름을 맞이하여 일년 농사의 풍작을 기원하고 액을 막으며 동네의 평안과 마을의 풍년을 기리는 줄다리기로 이어졌다. 일제강점기 및 1980년대까지 명맥을 유지하였으나 1980년대 중반부터 1994년까지 명맥이 끊겼다가 1995년 동민 및 청년회를 중심으로 복원하여 현재는 「코잡이놀이」라는 이름으로 불리어오고 있다.

 

이의동 길마재줄다리기
영통구 이의동 길마재마을과 용인시 수지면 상현리 독바위마을 사람들이 오래 전부터 전승해 오던 민속놀이로서 3년에 한 번씩 정월대보름 다음날 밤 모든 마을사람들이 나와 어른 남자는 동쪽 줄(숫줄)에, 여자나 총각 및 어린이는 서쪽 줄(암줄)에 자리 잡고 줄다리기를 시작한다. 결과는 항상 서쪽 편이 이기게 되는데 그래야 풍년이 들고 마을에 나쁜 일이 생기지 않는다고 믿기 때문이다. 우리의 전통적인 대표적 줄다리기 풍습이다.

 

버드내 산제당
버드내 산제당은 옛날부터 이어져온 수원시의 대표적인 마을 제당 중의 하나였다. 윗버드내(세류 3동)의 산제당에서 벌어지는 마을 공동의 제의는 ‘당제’, ‘당제사’, ‘산신제’, ‘산제사’ 등으로 불린다. 본래 당집의 형태는 전하는 바가 없었으나, 흙벽에 기와지붕이었던 당집의 훼손이 심하여 1956년 시멘트블럭으로 벽을 쌓고 슬레이트 지붕으로 중건하였다. 이 역시 세월이 흐르면서 낡고 훼손이 심하여 2007년 7월 10일 현재의 모습으로 중건하였다. 당제는 매년 음력 시월 초하루 저녁에 벌어지며, 마을의 평안과 마을 사람들의 무병장수, 풍요로운 수확을 기원하는 전형적인 농촌마을의 제의였음을 보여준다.

 

벌말 도당굿 및 도당
벌말은 평동에 있는 마을로 벌말 도당은 원래 초가로 되어 있었고 나무 비석도 있었다고 한다. 그러나 6?25전쟁 때 파괴되어 선경직물의 사장이었던 최학배씨가 동네 주민들과 협조해서 기와와 석조 건물로 개축했다. 도당 안에는 말을 탄 신라 경순왕인 김부대왕과 안씨부인을 그린 탱화가 벽면에 걸려 있다. 벌말 도당굿은 음력 정월 11일에 마을에 있는 도당에서 당주 굿을 한 후 서낭모시기와 마을을 한 바퀴 도는 돌돌이 후 당 안으로 들어가서 본격적인 도당굿이 펼쳐진다. 200년 이상 마을의 안녕과 풍요로운 농사를 기원하는 대동굿으로 전승되었다.

 

동래정씨 약사불
수원시 화서동에서 2008년 수원박물관으로 옮겨온 석불로 최근까지 동래정씨 집안 여인들에 의해 매월 초하루와 보름날에 제의가 이루어졌었다. 삼존상으로 본존 여래좌상과 좌우협시 보살입상으로 구성되었으며, 본존상의 머리 뒤쪽에는 원형 두광(頭光)이 표현되었다. 전체적으로 불상의 몸 부분 곳곳에는 채색한 흔적이 남아있고, 큼직한 이목구비에 미소를 머금은 듯한 표정은 원만한 인상을 주는 요소이다. 과감하게 생략된 옷주름, 앙련(仰蓮)과 복련(復蓮)으로 이루어진 연화대좌의 소박한 형태와 세부적인 조각 수법 등에 비추어 볼 때 제작 시기는 고려중기 이후로 추정된다.

 

만석거
만석거(萬石渠)는 장안문 북쪽의 황무지를 개간하고 안정된 농업경영을 위한 수리시설로서 1795년(정조 19) 축조되었으며 ''일왕저수지''나 ''조기정방죽'', ''북지'' 등으로 불리기도 한다. 만석거는 정조대왕 때 최신의 수문과 수갑을 설치하였으며, 여기에 모인 물을 농업용수로 이용하여 대규모 농장인 대유둔(北屯)을 설치하여 풍요로움을 누리고자 했던 곳이다. 저수지 가운데는 작은 섬을 두어 화목을 조화롭게 심고, 호수에 연꽃을 심었으며, 호수 남단의 약간 높은 곳에는 정자인 영화정(迎華亭)을 세워 만석거 부근을 조망할 수 있도록 배치하였다. 만석거는 예로부터 농업용수로 중요하게 사용되었고, 주변 경관 또한 아름다워 누렇게 익은 벼가 황금 물결을 이루는 풍경은 ‘석거황운(石渠黃雲)’이라하여 ‘수원 추팔경’(수원의 아름다운 가을 풍경)에 하나로 꼽았다.

 

숙지산 화성 채석장
화서전철역 부근 구 연초제조창의 건너편 숙지산 여러 곳에 분포하고 있으며, 화성을 축조하기 위한 성돌의 채석이 이루어졌던 유적으로 팔달산과 함께 중요한 성돌의 공급원이었던 곳이다. 이곳에서 숫돌같이 판판한 치도(治道)를 통하여 수레를 이용 화성 축성 장소까지 성돌을 운반하였다. 채석 당시의 쐐기 자국이 여러 곳에 남아있어 역사적으로 높은 가치를 지닌 유적이다.

 

화성관련 표석 일괄
정조의 현륭원 원행길에 이정표로 세운 상류천, 하류천, 괴목정교 표석과 축만제의 둑에 세워진 축만제 표석, 정조대의 원행길에 들어있지 않아 1834년 세웠을 것으로 추정되는 남창교 표석 등 5기가 일괄지정되었다.

 

전주류씨 효자정문
정려문은 충신(忠臣), 효자(孝子), 열녀(烈女) 등 다른 사람에게 모범이 될 만한 인물의 행적을 널리 알리고자 마을 입구나 집 대문 앞에 나무로 만들어 세우던 붉은 문이다. 전주류씨 효자정문은 상촌의 전주 류씨 사호공파의 종가인 류원상씨 댁 대문 옆(수원시 권선구 금곡동 618-2)에 있었으나, 2008년 수원박물관으로 이전하여 원본은 보관중이고 야외에 재현품을 만들어 전시하고 있다. 류태명(柳泰明 : 1666~1716)과 증손자 류의(柳誼 : 1734~1799)의 효자 정려문을 정려각에 상하로 걸어 놓았다.

 

능행차연시
정조대왕은 아버지 사도세자의 능을 수원으로 옮긴 후 매년 한두 차례씩 총 13차례나 수원에 행차하였다. 그 가운데 가장 규모가 컸던 행차가 1795년 혜경궁 홍씨의 회갑연을 위한 능행차로서 어가를 따라간 인원은 1,779명에 달하고, 말은 779필이나 되었다. 그러나 실제 동원된 인원은 5군영과 장용영 군사들을 합쳐 대략 6,000명에 달한다. 첫째날 서울의 창덕궁을 출발하여 노량행궁을 지나 시흥행궁에서 하룻밤을 묵고, 다음날 사근참 행궁을 지나 화성행궁에 도착하였다. 8일간의 행차길에는 향교를 참배하고, 과거시험을 치러 인재를 등용하고, 대규모 군사훈련을 실시하였다. 그리고 봉수당에서의 화려한 회갑잔치와 함께 백성들에게 쌀과 죽을 나누어 주며, 양로연도 펼쳐져 서로 즐거움을 함께하였다. 또한 이 능행길에서는 한강을 건널 때 배다리를 이용하기도 했다. 정조대왕의 능행차는 수많은 공식행사와 함께 백성의 괴로움을 두루 살피고, 아버지 사도세자와 어머니 혜경궁 홍씨에 대한 효심의 표현이었다.

 

무예24기
무예24기는 조선 정조대왕(1776~1800) 때에 장용영에서 펴낸 『무예도보통지』에 실린 24가지 무예를 말하며 맨손무예 1가지, 도검무예 10가지, 창봉무예 7가지, 마상무예 6가지 등 총 24가지의 종합무예이다. 조선시대 군사들이 익혔던 군사무예의 완결판으로 무과시험의 과목이었으며, 대한제국기 구식군대가 해체될 때까지 조선의 군사들이 익혔던 군사무예이다.

 

이고 묘역
이고(李皐, 1338~1420)의 본관은 여주이고 호는 망천이며, 사온령공 이윤방(1310~?)의 아들이다. 고려 말 관직에 나아가 한림원학사에 올랐으나 고려가 쇠망해 가자 수원으로 내려와 은거하였다. 수원에서 널리 알려진 팔달산, 권선구 등의 지명은 모두 이고와 관련된 것이고, 1795년 정조가 묘역에 치제하면서 ‘팔달산주인’으로 일컬어 수원의 대표적인 인물로 알려지게 되었다. 묘역에는 후대에 마련한 것으로 추정되는 혼유석, 상석, 향로석과 1733년(영조 9)에 건립한 묘표가 있다.

 

안동김씨 참의공파 세장묘역
안동김씨 참의공파는 수원지역의 대표적 성씨 중 하나로서 형조참의를 지낸 김언침(金彦?, 1514~1584)과 그 후손의 묘역으로 크게 2개 지역으로 나뉘어 분포되어 있다. 김언침은 조선중기의 문신으로 본관은 안동, 자는 정중(靜仲)으로 김로(金瀘)의 아들이다. 묘역에는 옛 석물로 혼유석, 상석, 향로석, 촉대석, 망주석, 문인석, 방부가 있다. 부부의 합장묘로 하단이 매몰된 향로석의 좌우에 촉대석을 설치하였다. 안동김씨 참의공파 세장묘역에는 김언침의 아들 김찬을 비롯한 후손들의 묘가 자리잡고 있다. 김찬(金瓚, 1543~1599)은 선조대의 문신으로 자는 숙진(叔珍), 호는 눌암(訥菴)이다. 묘역은 쌍분 형식으로 호석을 둘렀다. 옛 석물로는 혼유석, 상석, 향로석, 촉대석, 망주석, 문인석, 방부가 있다. 묘역과 석물양식이 거의 원형으로 보존되어 있어 조선시대 묘제연구에 중요한 자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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